글-5) 소금양
나는 애들에겐 언제나 자율을 강조한다.
애 어미가 직장을 다니는 탓도 있지만 스스로 하지 않고는 모두가 피곤해 지기 때문일 게다. 직장 다니는 가정주부의 공통된 고민이 자신의 업무에 관한 사항이 아니라 가사와 육아일 정도로 큰 업보(?) 마냥 힘든 게 사실인 모양이다. 우리 아버지 세대만 해도 ‘남자는 직장에서, 여자는 가사’를 책임지는 두 사람이 이 인분의 일을 해 오며 살았으나 아내는 결혼 전부터 다닌 직장을 그만 둘 생각을 않는다. 남산만한 배를 밀며 아파트 계단을 오를 때에도, 애가 둘씩 달린 후에도 그랬다. 그렇다고 남편인 내가 자상하여 집안일을 잘 거들어 주느냐 하면 ‘그건 전혀 아니 올시다’이다.
집안일이야 분담만 잘 하면 한 사람이 1.5인분씩이겠지만 내가 어디 그만한 위인이어야지. 그러니 자연 아내의 할 일이 거의 2인분이다. 수퍼 우먼처럼 여자의 능력이 배가되지 않고는 지속 할 수 없는 일이 바로 직장 가진 주부의 숙명인 것이다. 겨우 내가 아내를 위해 하는 일이란 게 ‘내 일만은 당신 손 안 빌리고 내가 스스로 하겠노라’가 전부다. 일단 챙겨만 주면 옷이건 내 앞가림은 한다는 것이다. 오랜 혼자 생활에 이골이 나서 그런지 처음에는 두 사람이 한 집에 산다는 것도 적응이 안 될 정도였다.
더구나 둘째가 젖먹이이던 시절에는 초저녁엔 내가, 새벽녁엔 아내가 애를 돌보기도 하였는데, 아내는 그 일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내가 아내더러 진학하면 애를 더 많이 봐 주겠노라고 했을 때 두 말 않고 입학시험 쳐 대학원 진학을 하기까지 했다. 물론 나도 그때 제법 바쁜 체 하던 때였다. 그렇다고 내가 약속대로 애를 봐 주었던 건 아니다. 하도 안 되니 ‘육아는 당신이, 교육은 내가’ 분담하는 게 어떻겠느냐며 그 당시의 힘든 위기를 살짝 피해가고자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그때는 직장, 학위과정 수업과 실험 그리고 학교에선 시간강사 노릇에다 아내마저 직장과 가사, 육아 그리고 대학원까지 다녔으니 그야말로 두 사람이 5인분 정도의 일을 해 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마치고 나니 애들도 훌쩍 자라있고 둘 다 학위과정까지 마치니 요즘은 일 많다 할 계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나의 게으른 천성이 어디 애들이 자랐다고 없어지기야 한가? 말귀를 알아들을 지금은 애들에게 ‘네 인생은 너의 것’ 한마디로 애들에게 자신의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자율이 강조 될 수밖에. 어떤 집에서는 부모가 너무 간섭이 심해 ‘엄마, 제발 내버려 주세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께요’ 한다던데 우린 그렇지 않다. 장남은 이따끔 ‘진짜 우리 부모 맞나?’ 하곤 한다. 정말 부모가 민주적이고 개방 내지는 진취적이어서 애들을 개성껏 키우고자 그러는 게 아니라 아내는 ‘육아 끝, 교육 관심 끝’을 선언하고 손을 떼었으니 자연 애들의 교육은 게으른 내 차지다.
나는 내가 애들을 돌보는 성가심을 피하기 위해 ‘자율’이란 미명하에 교묘히 무관심하고 싶은 것이다. 나 하나 편하기만도 버거운데 내가 이 꼬맹이나 잡고 씨름해야겠어? 그러니 애들 학습지도니 뭐니 하는 것은 애시당초 틀린 일이다. 나는 애들에게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는 것’이라던가 아니면 ‘적어도 고2는 되어야 가르치든 말든 하지 지금 이 수준에 뭘 가르치냐, 내 실력 줄겠다’하며 강변 해 버리고 만다. 방학 숙제가 뭔지 준비물 한 번 안 챙겨 줘도 애들은 자주 과제물 상장도 받아 오는 대견함도 있다. 아마 챙겨 주는 엄마가 있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못했으리라는 생각은 든다. 스스로 아니하면 불편하다는 걸 애들이 이미 깨달은 것만 같다. 이런 일련의 언행이 애들의 자율이니 뭐니 하는 게 아니라 내 게으름의 소치인 것을 지금쯤은 알아채었을까?
그러나 내가 아무리 게으르다 해도 애들과의 대화는 재미있다. 애 셋을 낳아 키워봐야 부모의 은공을 안다고들 했는데 나는 내 부모님께 물어 보고 싶다. ‘우리 키우실 때에도 이리 재미있으셨어요?’ 라고. 특히 딸애와의 대화는 더욱 재미있다. 아들놈은 믿음직한 맛에, 딸애는 아기자기한 맛이라던가? 나는 ‘딸 없는 남자의 일생은 헛것이다‘라고 자주 말하곤 한다. 아들만 여섯 키우셨다는 가친은 ’무슨 재미로 사셨을까‘ 묻고 싶다. 그만큼 재미있다.
장딸(우린 장딸 하나에 장남 하나다)이 유치원 때 하루는 자기 선생님이 결혼을 하니 꼭 가 봐야겠다고 의견을 내었다. 여느 부모처럼 엄마가 데리고 갈 수만 있다면 꼭 안 갈 곳도 아니건만 우린 그런 처지는 아닌지라 내가 설득에 나섰다. 아직 나는 이유 없이 애들의 의견을 윽박질러 본 적은 없다. 간간이 어미의 목소리 톤이 높을 때는 있으나 나는 절대 큰소리는 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자신이 없음을 스스로 자인하는 행위가 큰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상황을 끝내야 되겠다고 생각되면 폭력이라도 쓰겠지만... 애들 정도야 무슨 큰소리나 폭력이 필요할까 싶어 말로써 시작한 것이 끝날 생각을 않는다.
유치원 다니는 그마만한 눈 높이에서 선생님의 결혼식은 정말 대단한 일이고 응당 가고 싶어하는 갸륵한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버스를 타고 멀리 찾아 가야한다는 것이 유치원 꼬맹이에겐 아무래도 무리다 싶어 이번에는 참석 못할 것 같다며 설득을 하기 시작했다.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 나는 안다. 단 한마디로 끝을 낼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아무리 애라 해도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가고자 하는 마음은 옳은 일이나 상황이 여의치 못하노라 설명해도 가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큰 탓이었는지 쉬 포기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결국 이틀 만에 좀 더 자라 혼자 갈 수 있을 때에는 보내 주겠노라는 선에서 합의가 되어 일단락이 되었다.
이후에도 아내와의 대화는 일초 게임인 경우는 있어도 애들과는 한 번 시작하면 장기전에 돌입하기 일쑤다. 하여 장남은 ‘아버지랑 이야기하면 아버지 페이스에 말려들고 만다’며 논쟁 자체를 피하는 듯한 경우도 자주 있다.
장딸이 중1 때 자주 있는 일은 아닌데 하도 이해하기 어려웠는지 수학 문제를 하나 들고 왔다. ‘소금물, 농도, 석출되는 소금양’에 관한 문제는 우리가 어렸을 때에도 이해하기 어려웠던 기억이 아는지라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석출되는 소금양은 %농도 x 소금물양이고 몇%와 몇%를 섞으면 어쩌고 하며 저녁 전에 시작한 설명이 끝이 없이 이어진다. 결국 당일 이해가 다 안되어 다음날 저녁에 또 같이 앉았다. 설명이 부실한지 아니면 딸애의 이해력이 부족한 지 설명은 어제 밤과 도합 8시간을 넘겨야 했다. 여자들은 이성적인 사고와 수리적인 측면이 약한 대신 감성이 발달하고 언어 인지능력이 우수하다는 등 좌뇌, 우뇌 말은 들은지라 정말 딸애 머리 속에 한 번 들어 가 보고 싶은 충동마저 느낄 정도로 설명이 길어졌다. 이미 소금양은 종이가 닳아 없어 질 정도로 설명했건만.....
연 사흘에 걸친 설명을 다 이해하였는지는 뇌 속을 확인 못한 채로 끝이 났으나 그 날 이후로 우리 장딸의 별명이 바로 ‘소금量’이 되었다. ‘소금孃!’ 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성경 말씀보다 백 배 더 좋다.
그래서 나는 딸애를 내 인생의 빛과 소금으로 생각하며 사랑하고 산다. 그리고 애들은 공부를 잘해서 ‘자랑거리’로서가 아니라 건강하게 커 주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겐 고마운 ‘사랑거리’인 것이다.
-1998년 어느 날, 애들에게 바이오 토이(bio-toy)라 부르다 핀잔을 듣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