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남기고 싶은 글

글-5) 소금양

Dr조은샘 2021. 12. 14. 11:38

나는 애들에겐 언제나 자율을 강조한다.

 

애 어미가 직장을 다니는 탓도 있지만 스스로 하지 않고는 모두가 피곤해 지기 때문일 게다. 직장 다니는 가정주부의 공통된 고민이 자신의 업무에 관한 사항이 아니라 가사와 육아일 정도로 큰 업보(?) 마냥 힘든 게 사실인 모양이다. 우리 아버지 세대만 해도 남자는 직장에서, 여자는 가사를 책임지는 두 사람이 이 인분의 일을 해 오며 살았으나 아내는 결혼 전부터 다닌 직장을 그만 둘 생각을 않는다. 남산만한 배를 밀며 아파트 계단을 오를 때에도, 애가 둘씩 달린 후에도 그랬다. 그렇다고 남편인 내가 자상하여 집안일을 잘 거들어 주느냐 하면 그건 전혀 아니 올시다이다.

 

집안일이야 분담만 잘 하면 한 사람이 1.5인분씩이겠지만 내가 어디 그만한 위인이어야지. 그러니 자연 아내의 할 일이 거의 2인분이다. 수퍼 우먼처럼 여자의 능력이 배가되지 않고는 지속 할 수 없는 일이 바로 직장 가진 주부의 숙명인 것이다. 겨우 내가 아내를 위해 하는 일이란 게 내 일만은 당신 손 안 빌리고 내가 스스로 하겠노라가 전부다. 일단 챙겨만 주면 옷이건 내 앞가림은 한다는 것이다. 오랜 혼자 생활에 이골이 나서 그런지 처음에는 두 사람이 한 집에 산다는 것도 적응이 안 될 정도였다.

 

더구나 둘째가 젖먹이이던 시절에는 초저녁엔 내가, 새벽녁엔 아내가 애를 돌보기도 하였는데, 아내는 그 일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내가 아내더러 진학하면 애를 더 많이 봐 주겠노라고 했을 때 두 말 않고 입학시험 쳐 대학원 진학을 하기까지 했다. 물론 나도 그때 제법 바쁜 체 하던 때였다. 그렇다고 내가 약속대로 애를 봐 주었던 건 아니다. 하도 안 되니 육아는 당신이, 교육은 내가분담하는 게 어떻겠느냐며 그 당시의 힘든 위기를 살짝 피해가고자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그때는 직장, 학위과정 수업과 실험 그리고 학교에선 시간강사 노릇에다 아내마저 직장과 가사, 육아 그리고 대학원까지 다녔으니 그야말로 두 사람이 5인분 정도의 일을 해 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마치고 나니 애들도 훌쩍 자라있고 둘 다 학위과정까지 마치니 요즘은 일 많다 할 계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나의 게으른 천성이 어디 애들이 자랐다고 없어지기야 한가? 말귀를 알아들을 지금은 애들에게 네 인생은 너의 것한마디로 애들에게 자신의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자율이 강조 될 수밖에. 어떤 집에서는 부모가 너무 간섭이 심해 엄마, 제발 내버려 주세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께요한다던데 우린 그렇지 않다. 장남은 이따끔 진짜 우리 부모 맞나?’ 하곤 한다. 정말 부모가 민주적이고 개방 내지는 진취적이어서 애들을 개성껏 키우고자 그러는 게 아니라 아내는 육아 끝, 교육 관심 끝을 선언하고 손을 떼었으니 자연 애들의 교육은 게으른 내 차지다.

 

나는 내가 애들을 돌보는 성가심을 피하기 위해 자율이란 미명하에 교묘히 무관심하고 싶은 것이다. 나 하나 편하기만도 버거운데 내가 이 꼬맹이나 잡고 씨름해야겠어? 그러니 애들 학습지도니 뭐니 하는 것은 애시당초 틀린 일이다. 나는 애들에게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는 것이라던가 아니면 적어도 고2는 되어야 가르치든 말든 하지 지금 이 수준에 뭘 가르치냐, 내 실력 줄겠다하며 강변 해 버리고 만다. 방학 숙제가 뭔지 준비물 한 번 안 챙겨 줘도 애들은 자주 과제물 상장도 받아 오는 대견함도 있다. 아마 챙겨 주는 엄마가 있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못했으리라는 생각은 든다. 스스로 아니하면 불편하다는 걸 애들이 이미 깨달은 것만 같다. 이런 일련의 언행이 애들의 자율이니 뭐니 하는 게 아니라 내 게으름의 소치인 것을 지금쯤은 알아채었을까?

그러나 내가 아무리 게으르다 해도 애들과의 대화는 재미있다. 애 셋을 낳아 키워봐야 부모의 은공을 안다고들 했는데 나는 내 부모님께 물어 보고 싶다. ‘우리 키우실 때에도 이리 재미있으셨어요?’ 라고. 특히 딸애와의 대화는 더욱 재미있다. 아들놈은 믿음직한 맛에, 딸애는 아기자기한 맛이라던가? 나는 딸 없는 남자의 일생은 헛것이다라고 자주 말하곤 한다. 아들만 여섯 키우셨다는 가친은 무슨 재미로 사셨을까묻고 싶다. 그만큼 재미있다.

 

장딸(우린 장딸 하나에 장남 하나다)이 유치원 때 하루는 자기 선생님이 결혼을 하니 꼭 가 봐야겠다고 의견을 내었다. 여느 부모처럼 엄마가 데리고 갈 수만 있다면 꼭 안 갈 곳도 아니건만 우린 그런 처지는 아닌지라 내가 설득에 나섰다. 아직 나는 이유 없이 애들의 의견을 윽박질러 본 적은 없다. 간간이 어미의 목소리 톤이 높을 때는 있으나 나는 절대 큰소리는 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자신이 없음을 스스로 자인하는 행위가 큰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상황을 끝내야 되겠다고 생각되면 폭력이라도 쓰겠지만... 애들 정도야 무슨 큰소리나 폭력이 필요할까 싶어 말로써 시작한 것이 끝날 생각을 않는다.

 

유치원 다니는 그마만한 눈 높이에서 선생님의 결혼식은 정말 대단한 일이고 응당 가고 싶어하는 갸륵한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버스를 타고 멀리 찾아 가야한다는 것이 유치원 꼬맹이에겐 아무래도 무리다 싶어 이번에는 참석 못할 것 같다며 설득을 하기 시작했다.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 나는 안다. 단 한마디로 끝을 낼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아무리 애라 해도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가고자 하는 마음은 옳은 일이나 상황이 여의치 못하노라 설명해도 가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큰 탓이었는지 쉬 포기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결국 이틀 만에 좀 더 자라 혼자 갈 수 있을 때에는 보내 주겠노라는 선에서 합의가 되어 일단락이 되었다.

 

이후에도 아내와의 대화는 일초 게임인 경우는 있어도 애들과는 한 번 시작하면 장기전에 돌입하기 일쑤다. 하여 장남은 아버지랑 이야기하면 아버지 페이스에 말려들고 만다며 논쟁 자체를 피하는 듯한 경우도 자주 있다.

 

장딸이 중1 때 자주 있는 일은 아닌데 하도 이해하기 어려웠는지 수학 문제를 하나 들고 왔다. ‘소금물, 농도, 석출되는 소금양에 관한 문제는 우리가 어렸을 때에도 이해하기 어려웠던 기억이 아는지라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석출되는 소금양은 %농도 x 소금물양이고 몇%와 몇%를 섞으면 어쩌고 하며 저녁 전에 시작한 설명이 끝이 없이 이어진다. 결국 당일 이해가 다 안되어 다음날 저녁에 또 같이 앉았다. 설명이 부실한지 아니면 딸애의 이해력이 부족한 지 설명은 어제 밤과 도합 8시간을 넘겨야 했다. 여자들은 이성적인 사고와 수리적인 측면이 약한 대신 감성이 발달하고 언어 인지능력이 우수하다는 등 좌뇌, 우뇌 말은 들은지라 정말 딸애 머리 속에 한 번 들어 가 보고 싶은 충동마저 느낄 정도로 설명이 길어졌다. 이미 소금양은 종이가 닳아 없어 질 정도로 설명했건만.....

 

연 사흘에 걸친 설명을 다 이해하였는지는 뇌 속을 확인 못한 채로 끝이 났으나 그 날 이후로 우리 장딸의 별명이 바로 소금이 되었다. ‘소금!’ 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성경 말씀보다 백 배 더 좋다.

 

그래서 나는 딸애를 내 인생의 빛과 소금으로 생각하며 사랑하고 산다. 그리고 애들은 공부를 잘해서 자랑거리로서가 아니라 건강하게 커 주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겐 고마운 사랑거리인 것이다.

 

-1998년 어느 날, 애들에게 바이오 토이(bio-toy)라 부르다 핀잔을 듣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