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남기고 싶은 글

글-0) 나? 촌놈.

Dr조은샘 2021. 12. 14. 11:30

나는 촌놈이다.

누구에게도 내가 촌놈이었음을 숨기지 않는다. 당당하게 촌놈이라 밝힌다. 스가발놈? ㅎㅎㅎ

 

나는 강원도 두메 산골은 아니지만 전부해서 20호 될까말까하는 작은 섬 바닷가에서 자랐다. 깡촌에서 태어나 동생이 일찍 태어나는 바람에 젖먹이 때부터 부모곁을 떠나 유년시절까지 전기도, 버스도 없던 작은 섬 할머니댁에서 자란 나로선 크게 출세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위치가 천지개벽이다. 맘만 먹으면 비행기도 자주 타니 말이다. 모두 들로 일 나가고 혼자 시골집에 오롯이 남아 배고프면 흙 담벼락 곱돌을 씹던 기억도 새롭다. 점심도 있는 사람들이나 먹던 호사였던가? 송구에 소나무 보리밥, 메 뿌리에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이었다. 국민학교 1학년 1학기를 거기서 조금 대처로 다녔는데... 어린 걸음으로 30여분 산비탈을 걸으면 나룻터가 나온다. 목이 터져라 타관아라고 부르면 물 건너 사공이 배를 저어 건넨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라도 조금 불면 이 사공놈이 미친척한다. 후에 항의를 하면 안들리더라면 그만이다. 이 놈은 매년 추수철이면 머슴 세경처럼 온갖 곡식을 다 받아먹는 우리의 종인데... 삐걱거리며 30분간 나룻배를 타고 또 족히 1시간 반은 걸어야 저 산 아래 학교가 보인다. 거의 산마루에서 학교 시작종을 듣는다. 내려가노라면 벌써 1교시가 끝나가고 철없는 아이놈들은 ! 섬 아~들 인자 온다하면서 놀린다. 해서 우리 섬 아들은 결석이나 지각을 매기지 않았다. 내가 학교를 세 번이나 옮기고서도 6, 12년 개근상을 받은걸 보면 자명하다. 이때부터 나는 대인기피증이 생겼다. 덩치 큰 아재뻘 되는 형들이 등교하다 재실에서 놀다가자하면 그냥 도시락 까먹고 놀아야했는데 나는 그것도 매우 싫었다. 아버지와 같이 가는 날은 안심이었다. 나룻배도 땡땡이도 다 해결되니 말이다. 해안도로가 생기고 결혼 후 출향민이라고 각 집에서 갹출하여 연육교를 놓고서야 나룻터도 없어지고 아직 버스는 아니지만 승용차 하나 정도는 드나든다. 로봇랜드 관광지로 개발한답시고 마산시에서 왕복 4차선 다리를 놨으니 정말 격세지감이다. 그 산 아래 통학로에 가친께서 가로등을 하셨고...

 

그런 촌놈이래서인지 나는 아직도 커피 맛을 모른다. 숭늉만 마셔오다 언제 커피 마실 여유가 있어야지. 그래서 가장 잘 마시는 기호 식품이 물이다. 물 배 채우던 기억도 있으니 말이다. 담배만 해도 그렇다. 대학 들고 장초를 주워, 은하수 필터에 새마을 끼워서 은마을이니 새마수하며 꽁초를 손을 호호 불어가면, 켁켁거리며 피워 보기도 했으나 그것도 비참하고, 또 끊는 노력 1/10만 하면 피우고 싶은 호기심 누른다기에 아예... 그때 이후로 담배와는 인연이 없다. 술은 마시면 마시겠더만 그것도 녹녹쟎이 돈이 든다. 언제나 장학금 면제(?)에다 향토 장학금도 없으니 자연 거지 생활에 익숙할 밖에.... 연애다운 연애 시절...전화도 잘 없던 시대에 1년에 300번 만나고 200번 편지하던 때에도 다방은 언감생심 근처에도 어려웠다. 학교 정문 앞, 전봇대 아래가 내 단골 약속 장소다. 어쩌다 그녀가 다방에 들어가 있어라 하면 안심하고 다방에 죽칠 수 있었다. 그날은 그녀가 돈 내는 날이기 때문이고....

 

이런 내가 처음 마산으로 나왔다. 아버지와 버스를 탓는 데 사거리에 교통순경이 서서 일일이 손짓으로 차 가는 방향을 지시하는 게 아닌가? 일순 내가 탄 차를 저 순경이 방향을 잘못 지시하면 어쩌나 하며 맘을 졸였다. 다행히 우리가 갈 방향을 지시하니 버스는 커브를 돌아 나아간다. 다행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방향지시등은 어떤 일이 있어도 조작한다. 그날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버지께서 설탕이 묻은 동그란 튀긴 빵을 사주셨다. 너무 맛있어 한개만 더 먹고 싶었는데 이름을 몰라 우물거리다 결국 맛보지 못한 것이 도너츠라는 것이다. 한 번은 택시를 탔는 데 택시 문을 못 열겠는지라....얼마나 헤메었는지 모른다. 하여 나는 아직도 택시 문가엔 잘 앉지 않는다. 길게 끈을 단 미닫이 창호지문이 내가 알던 전부였으니... 학교 오니 여닫이 유리창문이 있더라. 내 책을 처음 산 마산 학문당 서점은 아직도 내 가슴에 묻힌 보고다. 살아서, 배워서 빈곤해서 알게된다는 공자님 말씀을 확신하며 나 마음은 여전히

촌놈 백세, 천세, 만세! 만만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