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 후기

후기-9) 경주 벚꽃 마라톤 후기

Dr조은샘 2021. 12. 17. 13:24

-2003. 4. 5. 08:00-10:30-

 새는 날고 인간은 달린다. - 에밀 자토펙(1922-?)

혹시 아는가? 핀란드의 불세출의 육상영웅 누루미조차도 그 벽을 넘지 못했던 5m에서 마라톤까지 중장거리의 세계기록을 모두 갈아 치운 바 있는 체코의 인간 기관차, 역대 최고의 달리는 기계였던 그 할아버지 아직 생존해 있담 다음 동구 여행 때 한 번 만나보고 싶다.

 

각설하고... 인생은 이벤트라 했던가? 작년 9월 바다 마라톤에 겨우 10km(58)로 런닝에 입문한 후 기필코 올해는 하프(21.1km) 정도는 정복하리라는 목표를 세웠다. 겨울 내내 열심히 했고 유럽, 호주 여행에도, 싱가포르에 가서도 런닝은 걸르지 않았다. 11일 해맞이는 예년의 산 대신 광안대교 위를 달리며 하였다. 2월 경주 벚꽃 국제 마라톤 대회가 공고되었다. 마침 토요일이라 집식구와 꼬맹이도 참가 신청을 하였다. 물경 9만원 거금을 들여가면서.....돈 꼴고도 기분 좋은 일이 있긴 하다. 건강 검진하고서 실컷 돈 내고도 별일 없는 데요하면 다들 기뻐한다. 정밀검사일수록 비싸건만 기분은 더 흡족해 한다. 헛돈 썻다는 느낌이 없나보다. 그러니 의사가 공돈을 많이 번다? 글쎄다.

 

꼬맹이는 뛰기 싫어 죽을 맛인가 보다. 그러나 어쩌다 한 번씩 뛰기만 하면 제 어미, 아비보다 훨씬 빠르다. 아직은 심장이 말랑말랑한 덕분인지 자신만만해 하여 구태여 자주 데려가진 않았으나 우리는 주 3-4일 열심히 연습을 하였다. 공항 앞 낙동강변 20여 키로도 달려보고 금정 체육공원, 회동 수원지, 해운대 해안도로, 동백섬도 수 차례, 몇 개월간 몸 만들기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꼬맹이는 마라톤 그 자체보다 하루 놀러 가는 데 더 관심이 있나보다. 당일 새벽 5시에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처음 하는 마라톤이라 무리가 있을 것 같이 겸허한 마음으로 전날 경주에서 숙박을 하기로 하였다.

 

경주문화회관! 무궁화 5개짜리 특급인데도 이름 하나 때문에 꼬맹이는 시큰둥하다. 왜냐고? 조폭 깍두기가 하도 무식하다는 말이 싫어 교양을 쌓고자 세종문화회관에 공연을 보러 갔겠다. 공연 중에 똘만이가 전화를 때렸다. “행님, 어딥니까요” “나 여기 문화회관이데, ?” 했더니 그 똘만이 하는 말 행님, 섭합니다요. 나도 고기 좋아합니다했대나? 어쨋거나 보문단지 밤 벚꽃 아래로 늦게야 도착하여 잠을 청한다. 내기 까다로운 건 삼척동자도 아는 지라 그토록 준비 했건만 하나 빠진 게 있다. 베게를 잊고 안 가져 온 것이다. 당연 잠은 못 자는 거지. 방을 트리플을 주문 했는데 더블 하나에 싱글 하나다. 내 의도로는 싱글 세 개나 트윈+싱글로 생각했는데... 이래저래 잠을 설치고 죽 한 술 뜨고는 8시에 출발선에 선다. 봄날 아침 바람이 제법 싸늘하여 벗은 몸에 닭살을 돋게 한다. 이 무슨 사서 고생인가!

 

참석자 12,000명 중 남자, 하프, 40, 부산이 가장 표준 샘플이다. 일본인도 700명 정도 왔고 외국인도 자주 보인다. 당근 외국 여자들은 태산보다 큰 엉덩이로 돋보이지. 목표야 완주고, 잘하면 2시간 15분대? 좀 더 욕심을 내 볼까. 분당 6분씩하여 2시간 6분이면 나 영원히 경주 사랑할거야 정도로 잡았다. 대회 규정상 2시간 30분 내에 못 들어오면 회수차랑에 실려 와야 할 판이다. 일명 저승사자라 불리는 2시간 30분 페이스 메이크에겐 안 잡혀야지 하면서 1km/6분 속도로 출발하면서 일단 죽었다를 화두로 삼았다.

며칠 전부터 엉덩이 근처가 안 좋아 바세린을 바르고 하여 낙오하면 어쩌나 하는 심정이었지만 맨 뒤 쪽에서 천천히 따라 나섰다. 왜 주인공은 제일 끝에 혜성처럼 치고 나오는 걸 몇 번 보아왔다. 혹시라도 내게 그런 힘이 남아 주었으면 하면서... 남들은 로또 복권도 잘 걸린다는 데... 다행히 갈수록 통증이 덜했고 반환점까지는 물 한 모금 없이도 잘 견뎌 내 주었다. 7km를 지나면서 조금 속도를 내 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절망하고 말았다. 선두 그룹은 벌써 반환점을 돌아 나를 스쳐 지나고 있다. 그래도 10km 57, 이건 기적의 조짐이 보인다. 작년 10km 때 보다 1분 이상을 단축하였으니 말이다. 애 엄마는 의리 없이 저 혼자만 앞으로 내달린다. 그래도 내가 가장이니 꼬맹이는 돌 봐야지 하면서 같이 보조도 맞춰 본다. 제법 장하다. 쥐가 나는지 칙칙이도 뿌려가며... 17km 지점까지는 평탄하여 1시간 40분에 기분 좋게 내 달렸다. 엑스포장에서 보문호반 경주시내 반환하여 여기 북군마을 앞 벚꽃 터널까지 왔으니 이것만도 어디냐? 낙오해도 여한도 없으렷다. 아직은 발, 무릎, 엉치 이상 무. 다음은 죽음의 오르막이 이어진다. 애당초 내가 죽거든 이 지점일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전문적으로 근력 운동을 하지 않은 재야 아마추어로는 아무래도 무리다. 목표는 걷지 않고 나가기로 정했다. 이미 신기록은 물 건너 가고... 이러다간 저승 사자에게 잡혀 버스타고 결승선 지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이며 뒤 돌아 보니 꼬맹이는 그 회수차량 앞에서 저 혼자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다. 아무리 아비 마음이 안타까와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연습을 안 하더니 꼬맹이는 컨트리클럽 앞에선 아예 보이질 않는다. 차라리 편하게 차타고 오너라. 자슥 낙오 할려면 일찍 해야 고생을 덜하지 하면서 내리막을 내달리니 보문단지 호텔군이 일대 관병식 하듯 서 있다. 조선 호텔 앞을 지나니 청바지에 시내버스 타고 신혼여행을 왔으나 행색을 보고 신혼부부 아니래서 고생했던 기억도 함께...

 

앞으로 3km. 평소 같으면 단숨에 뛰어 내리겠건만 그 화사하던 벚꽃길 마저도 밉다. 그러나 아직은 두 발이 동시에 지면에 닿지는 않았다. 난 마라톤 중계를 볼 때마다 그 몇 분을 단축 못해서 기록을 놓치곤 하던 선수들을 보고선 병신하고 비아냥거리곤 했다. 그러나 직접 달려 보라. 그런 말이 나오는 가? 안 해 보고 남 말하기야 쉽지. 우리의 황영조와 봉달이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 것이다. 이거야말로 일각이여삼추다. 빤히 보이면서 거리가 줄지 않는 것. 이게 사람 죽여주는 거다. 어쩌면 영원히 결승점이 없는 것 아닌가 하면 아득해하는 순간 꼴찌에게 갈채를!” 팡파르와 함께 전광판은 ‘2시간 10’. 6분대 진입은 꼬맹이 돌보느라 못 한 걸로 자위하면서 아! 대단하다. 처음 도전에 한국 신기록에 3분 뒤진 호기록으로 들어오다니...사실 난 2시간대에만 들어오면 교수고 나발이고 집어치고 전업 할려 했다. IMF, 목 잘릴 일도 없고 정년퇴직도 없는 그야말로 보장된 나만의 직업 아닌가? 그러나 아직은 좀 더 노력해야겠다. 다음 대회에서나 전업을 신중히 고려해 봐야겠다.

 

들어오고 나서도 꼬맹이가 걱정되어 한참을 서성이니 다행히도 저승사자 코 앞에서 안 잡히고 거의 동시에 들어 와선 콕 꼬꾸라진다. 오르막 구간에서 가슴이 터지는 통증에도 끝까지 달려왔단다. 우리는 꼴찌가 위대하니 어쩌니 하면서도 일등만 추구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아니다. 의리없이 먼저 들어 온 애 엄마도, 죽자 살자 달린 나도 아닌 머리까지 멍하고 앞이 안보이면서도 달려온 꼬맹이가 오늘의 주인공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꼬맹이는 오늘로 마라톤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아직 시작도 아닌데. 섭하지만 그래 너 뜻대로 살아 보거라!

 

(; 이봉주는 42.195km. 우리는 21.0975km 기록임을 밝혀 둡니다요. 오해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