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왜 언제나 아내에게 미안해해야만 하는 것일까? 언제나 그게 불만이었지만 나는 적어도 남자라면 1년에 한 두 번 정도는 아내를 감동시킬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평소에 내가 아내에게 형편없다는 뜻은 절대 아니고. 벌써 15년이 다 되어 가니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름대로 아내를 감동시키려고 노력해 왔다. 초기엔 꽃을 여러 형태로 배달 시켜도 보고 편지며 전보를 시리즈로 하루 종일 보내보기도 했다. 기쁨 조를 보내 사무실이 떠나가도록 치어 리더 공연도 준비해 보고... 너무 황당해 하여 감동을 하는 지 않는 지는 모르지만 아내가 자청해서 치어 리더를 초대해서 저녁 대접을 하는 걸 보면 표현은 안 해도 기분은 좋은 모양이다. 결혼기념일마다 그런 일이 있으니 아내 사무실 여자 애들은 아예 그날이면 목을 빼고 올해는 무슨 재미있는 사건(?)이 있을까 하며 기다린다. 7년째 되던 해에는 미리 공표를 했다. 올해는 정말 여러분들의 의표를 찌르는 방법을 쓰겠으니 기대하시라고. 럭키 세븐이겠다. 정말 올해는 찐한 구경하게 됐다며 모두들 당일은 업무를 제쳐놓고 기다렸다는 것이다. 오전, 점심시간, 오후,,,, 그래. 역시 주인공은 늦게 나타나는 법이야 하며 심지어 여자 애 몇몇은 퇴근까지 미뤄 가면 기다렸다는 데... 사실 그날은 아무 일도 없기로 했다. 다음날 그야말로 의표를 찔렸다는 걸 안 그들의 허탈감이 대단했을 것이다. 참 나, 내가 기다리랬나 뭐랬나. 뭘 해도 야단법석이고 안 해도 저러니 날더러 어쩌라고? 나의 오만한 푸념에 아내는 말도 한마디 못한다. 그런 아무 일없는 기념일도 뜻 깊다. 우선 돈이 들지 않으니 더 좋고.
결혼 10주년 되던 해에는 중국 장안으로 불리던 서안교통대학의 초청으로 국제학술대회 논문발표 차 교수님들을 모시고 참석하게 된 것이다. 물론 내가 최 연소자로 모든 뒤치다꺼리를 해야되는 건 주지의 사실이고. 한가지 다행한 일은 처음으로 동부인한다는 것이다. 물론 나도 아내와 직장이며 애들 문제 등 무리를 해 가면 보름간의 중국대륙 탐험에 나선 것이다. 마침 아내의 생일이 중국여행 중에 들어 케이크나 짜장면이 아닌 정식 중국음식으로 생일 축하를 해 줄 양으로 학회 주최측에 간단한 편지를 보냈다. 잘 되면 아내의 감동은 이제 ‘띵호아!’ 정도 되리라는 기대감에. 물론 내가 아는 중국인은 등소평과 등야평 정도가 전부였다. 혹시 호텔 근처에 중국음식점이라도 추천해 주시면 호젓하게 저녁식사나 하며 아내의 생일을 이국에서 축하하겠노라고... 그러나 편지나 팩스, 전화 심지어 E-mail ID까지 보냈건만 답신이 없었다. 공산주의국가라서 편지가 전달이 안되었나? 아님 세계적인 석학 몇 백 명을 초대하는 학회라 나같이 하찮은 녀석의 편지에 관심인들 있었겠나? 만만디 왕 서방 기질은 어쩔 수 없어하며 섭섭한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아내에게 말 한마디도 못한 채 시무룩하게 천진으로 중국 행은 시작되었다. 예전 우리 사신들이 조공 차 중국을 가더라도 북경에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며칠씩이나 기다려, 그것도 자금성에까지 네발로 기어 들어가게 했다던 곳이 중국 아닌가? 항공로가 북경 관문인 천진까지 밖에 없어 천진에 내려 고속도로를 달려가노라니 꼭 조선시대 사신이 기어가던 그때 심정을 느낄만하다.
이런 저런 일정으로 사흘을 북경에서 보내고 마지막날 저녁 후 절대 외출은 삼가라던 인솔교수님의 당부 말씀이 있었으나 어찌 이 젊은 가슴이 호텔 방에만 쳐 박혀 있을 수 있겠는가. 나 아니면 또 누가 밤거리를 나가 본 단 말인가? 말이 통하지 않으니 시내 나갈 택시도 못 탈 게 뻔하니 교수님들은 나를 감시(?)하는 걸 잊고 주무시는 듯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내가 아니면 또 누가 이 북경의 밤거리를 나간단 말인가? 호기로 운동복 차림으로 호텔 네온사인이 보이는 데 까지만 나가기로 했다.
1원어치 만두도 먹어보고 예술(?)처럼 빚어 내린 길거리 칼국수도 사 먹고... 돈을 손바닥에 놓으면 음식값만큼 집어 가는 것이다 향챠이 냄새에 질급하면 그들은 또 재밌다는 듯이 웃고... 그게 밤거리 외출의 전부였다. 퍽 재미없어 하며 어느 큰 건물 안을 기웃거리노라니 인민복을 입은 아저씨가 쳐다보기에 놀라 되돌아가려는 차에 등 뒤에서 갑자기 ‘잘 가! 낼 또 보고...’하는 우리말이 들리는 게 아닌가! 아내와 내가 더 놀랐다. 이런 곳에서 우리말을 하는 학생을 만나다니... 그들은 북방교통대학에 어학 연수 온 학생으로 마침 학교 앞에서 친구를 배웅하던 참이었다. 의기투합하여 교정구경을 하기로 하고 학교로 들어서니 무섭던 아저씨도 말리지 않는다. 서울 출신 그 여학생은 명랑하게도 우리더러 ‘놀라시진 않겠죠’. 하며 앞선다. 건물을 돌아서다 우리는 흠칫 놀랐다. 거기엔 남녀 학생 한 쌍이 마치 한사람처럼 꼭 껴안고 서있는 것이다. 건물 모퉁이 구석진 곳마다 그러고 있는 모습에 우린 두 번이나 놀란다. 그 학생은 재미있다는 듯이 ‘결혼하신 분들이 뭐 그래 놀라세요?’ 하며 ‘아마 중국에는 아직 TV같은 오락기구가 없어 저러나 봐요.’ 하며 해설까지 덧붙인다. 기숙사에서 커피라도 한 잔 하시라는 제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커피포트 사용은 금지되어 있으나 몰래 쓴다며 웃으며 커피를 끓이고 있는 데 누군가 기숙사문을 밀고 얼굴을 들이밀더니 ‘어!’하며 이내 문을 닫고 사라지는 게 아닌가? 나는 커피포트를 사용하다 사감에게나 걸린 게 아닌가하고 걱정인데 그 여학생은 명랑하게 웃으면서 ‘뭘 그리 놀라세요? 괜찮아요. 여기 2층에 한 40명이나 있어요. 아까 그 사람은 지도원 동무 구요. 걔들은 외출도 않고 공부만 하니 우리는 장학금 엄두도 못 내요‘ 한다. ’우리도 시장 가서 북한서 왔다고 하면 더 많이 깍아주는 걸요’ 하며 재잘거린다. 나는 원래 커피를 마시진 않지만 그날은 정말 그 여학생의 호의가 하도 고마워서 한 잔 마시려고 했다. 그런데, 그런데 북한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북한 지도원 동무와의 조우라니...
아내도 이내 새파랗게 질린 눈치다. 커피고 뭐고 우리는 쫓기듯 학교를 나와 호텔에 당도하니 교수님께서 걱정하시며 기다리고 계셨다. 이실직고하면서도 ‘신분 노출은 안 되었노라‘고 변명을 늘어놓았으나 인솔교수님의 우려가 대단하였다. 그 당시에는 출국 전 통일원에 북한주민 접촉허가를 받든가 아님 추후 접촉 신고서를 내게 되어 있었다. 아무리 신분노출이 안되었다 해도 이 근처에 호텔은 여기 밖에 없고 또 부산에서 온 사람은 우리 일행밖에 더 있느냐. 공산국가 공안당국이 그리 허술하겠냐는 식으로 걱정을 하시는 데 정말 그 날 밤을 뜬눈으로 새우다시피 하였다. 내일 공항에서 검거되는 건 아닌지. 두고 온 애들,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다. 아! 야간 외출은 안 했어야 되는 건데... 난 사실 그 여학생에게 명함이라도 줘 다음에 부산 오면 정말 점심이라도 사 줄 양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황당한 경우란 말인가!
다음날로 북경공항에서 학회가 열리는 서안 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내 직분이 총무인지라 비행기 좌석 표를 바꾸는 일도 내 몫인 것이다. 공항에는 어찌 그리도 제복 입은 사람들이 많은지. 전부 경찰 아니면 공안원 같아 보여 나는 가능하면 그들의 눈에 안 띄려고 노력했다. 혹시 탑승 수속할 때 걸리지나 않을까. 국내선이라도 외국인은 여행심사를 할 것은 틀림없다. 같은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에는 심지어 여행허가증, 식량 권까지 있다지 않는가. 우리 일행은 서울, 광주, 부산 전부 하여 28명이었다. 예매권을 내고 좌석 표를 받는 데 27매만 주는 게 아니가! 공산주의 국가 항공사 직원은 설명이 없다. 자기 할 일은 다했으니 그만이라는 것이다. 또 어설픈 영어로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고. 순간 식은땀이 쭈룩 흐르며 얼굴이 사색이 된 것이다. ‘걸렸구나’. 내 좌석만 안 나온 게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하였다. 교수님께 먼저 떠나시라고 말씀을 드리니 걱정하시며 서로 대책 없이 웅성대는 것이었다. 그때 광주에서 오신 교수님 한 분께서 여행신청을 늦게 해서 자기는 1등석 표를 샀다는 것이 아닌가? 얼른 공항을 떠나고 싶어 뛰다시피 1등석 좌석을 바꾸고, 그분이 일행이랑 같이 앉겠노라 하셔서 나는 1등석에서 귀빈 대접을 받으며 기분좋게 서안으로 향했으나 불안한 기분은 떨칠 수가 없었다.
서안공항에 도착하니 학교당국에서 차와 사람을 보내왔다. 그런데 30인승 소형버스 맨 뒤편에 검은 안경을 낀 건장한 청년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역시 그들이구나.’ 1시간 남짓 호텔 가는 길이 어찌 그리도 멀던지... 아마 다 내리고 난 뒤 ‘선생, 잠시 같이 가실까요’ 할 게 분명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체포하는 것이 자기 나라를 방문해 준 손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겠지’하며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나는 호텔에 도착하고서도 젤 나중에야 내렸다. 호텔 문을 들어서는 순간, 호텔 지배인인 듯 한 사람이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Is Mr. Kim from Korea?'하는 게 아닌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며 짐을 옆 동료에게 맡기고 그들을 따라 나서니 ’With your wife'라 한다. 한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계속 따라오고 우리는 택시 뒷 자석에 구겨 넣듯이 앉아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길을 한참 달렸다. 아! 내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참 말이 통하지 않으니 최소한 영어 통역관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라는 마지막 소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큰 건물 앞에 내려 컴컴한 복도를 끝도 없이 그들을 따라 갔다. 유난히 큰 아내의 구두소리를 따라 세 남자의 툭한 구두소리만이 우리를 감쌌다. 그들도 아무 말이 없었다. 막다른 복도 끝 멈춘 곳 입구엔 ‘GUEST HOUSE'라는 현판이 눈에 확 들어왔다. 아! 여기가 말로만 듣던 ’초대소‘라는 곳이로구나 하며 최후의 절망을 하는 순간, 미닫이문이 양쪽으로 열리면서 환한 실내에는 내가 이 세상에서 본 가장 화려한 음식상이 차려져 있고 “Welcome! Mr. & Mrs Kim” 하는 환영의 박수가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지옥에서 천국으로 온 것이다. 내 편지를 받은 학회 주최측 교수님, 교직원 전부 모여 아내의 생일 파티를 준비하신 것이다. 부인과 가족까지 동반하셔서 작은 이웃나라에서 온 하찮은 나를 위해 더없이 중국적인 생일 성찬을 준비하신 것이다. 아내는 자신의 팔이 닿지 않을 만큼 큰 쌀 케이크를 자르고, 제 키보다 긴 국수 발에 놀라고... 정말 이게 다 먹는 음식인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많은 음식을 준비하셨다. 이럴 때 산해진미란 말을 쓰나보다. 회전 음식 판이 여덟 번이나 바뀌도록 이름 모를 음식이 줄을 이어 나오고... 건융 황제가 양주에서 3박 4일간 대접받으셨다는 49가지의 만한전석도 이보다는 덜 화려하였으리라는 생각마저 해 본다. 마지막으로 잉어 찜이 나오면서 아내는 상기되어 완전히 ’뿅‘ 가버렸다.
실컷 즐거워하다 갑자기 교수님께서 걱정하시리라는 생각이 들어 호텔로 전화를 했다. ‘교수님 여기 게스트하우스입니다’ 했더니 교수님은 ‘뭐? 초대소라고? 그래 어찌됐니?’ 하셨다. 나는 이후 자랑하고 싶어 간질거리는 입을 다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총무가 체포(?)된 그날 저녁 교수님 일행은 거의 굶다시피 하셨다나 뭐라나. 총무의 시식 없이 음식을 어깨 너머로 시켰더니 뭐 닭발 같은 걸 주면서 바가지를 왕창 썼다는 것이다. 교수님 일행은 먹지 못하셔서 속이 쓰렸고 우리는 너무 많이 먹어 속이 불편했던 것이다.
낮에 우리 차에 타고 있던 안경 낀 그들은 우리의 중국여행이 끝나는 순간까지 서안, 계림, 소주, 상해까지 우리와 함께 했다. 우리는 중화인민공화국 인민교육부의 초청을 받은 귀빈(?)인지라 국가에서 신변보호를 위해 안내원을 붙혀 주는 친절함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1994. 10월, 2주간 천진-북경-서안-함양-계림-상해-소주를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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