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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14) 잊을 수 없는 저녁 식사

Dr조은샘 2021. 12. 18. 16:12

(사랑에 빠진 한 쌍의 젊은이가

세계에서 가장 이름난 호텔에서 겪은, 잊지 못할 사건에 관한 실화)

 

버드; 30여 년 전 10월의 어느 비 내리는 밤, 나는 아나폴리스에 있는 해군사관학교 기숙사 내방에서 교과서를 들여다보면서 진 생각에 빠져 있었다. 진과 나는 그해 여름 시카고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 사이지만, 바로 사흘 뒤에 나는 사관학교로 되돌아와 법규의 울타리 속에 갇혀 지내야만 했고, 그녀는 머나먼 시카고에 스마트한 총각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정말 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한 가닥 희망은 있었다. 11월에 육사와 해사의 경기를 구경하기 위해 진이 필라델피아로 오기로 되어있었다. 진과 나는 뉴욕에 사는 숙부로부터 주말을 같이 보내자는 초청을 받은 상태였다. 나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 주말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진으로 하여금 평생 잊지 못할 특별한 주말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책을 한쪽에 밀어두고 편지를 썼다. 그것도 뉴욕의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 지배인 앞으로.

 

 

경애하는 지배인 귀하;

저는 오는 1127일 토요일에 필라델피아 시립경기장에서 열리는 해사와 육사의 풋볼경기가 끝나는 대로 지쳐 빠진 육사 선수들 사이를 헤치고 저를 기다리는 한 아가씨에게 달려 가 곧바로 뉴욕 행 열차를 탈 것 입니다. 뉴욕에 도착 즉시 택시를 타고 귀 호텔로 향할 예정인데, 바로 이 대목에서 귀하와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 측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 아가씨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지만 그녀는 아직 제게 마음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군대라는 수도원에 갇혀 있다보니 다린 제복에 여자와 외출할 기회는 하늘에 별 따기입니다. 따라서 그날 밤만은 어느 날보다도 더 멋있는 저녁이 되어야 하겠지요. 저는 그 날 저녁 그녀에게 구혼할 작정이니까요.

 

우선 테이블을 완벽하게 꾸며 주시고 그윽한 촛불, 눈처럼 새하얀 린넨 식탁보에 은은히 빛나는 은 식기가 준비되어야 하구요. 또한 주방장의 필생의 걸작이랄 수 있는 최고급 요리와 포도주를 준비 해 주시고 자정이 되는 찰나에 오케스트라가 네이비 블루 앤드 골드(미 해사 교가)”를 부드럽게 연주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그 순간 프로포즈 할 생각입니다. 저의 이 계획을 수락하신다는 뜻과 함께 대강 비용이 얼마나 나올 것인가를 통보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저의 봉급은 한 달에 고작 13달러이지만 그 동안 조금 모아 놓은 돈이 조금은 있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미합중국 해군사관생도

인스 올림

 

편지를 부치고 나서 금방 후회를 했다. 괜히 딱지가 덜 떨어지고 시건방진 대다 무엇보다도 주제 넘는 짓을 한 것 같았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호텔의 지배인이 하잘 것 없는 일개 해사 생도의 사랑 이야기 따위에 신경을 써 줄 것 같지 않았다. 편지를 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집어넣어 버릴 것이 뻔할 것만 같았다. 한 주가 지나고 또 한 주가 지났다. 나는 그 편지 건에 대하여 까맣게 잊고, 어떻게 하면 36시간 동안에 평생 나와 함께 살자고 진의 마음을 달래볼 수 있을까 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상 위에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이 겉봉에 찍힌 편지를 발견하였다.

 

해사생도 인스 귀하

귀하께서 보내 주신 멋진 편지는 당 호텔 간부들의 특별한 관심을 끌었습니다. 재미있는 제의기에 당 호텔의 주방장인 유명한 르네 블랙 씨가 제시한 의견을 여기에 적어 보겠습니다. “카스피해의 철갑상어의 알에 바다가재의 집게발을 넣은, 바다의 여신을 찬미하는 검은 진주같은 캐비어에다, ‘대서양의 처녀라고 불리는 전갱이의 저며 낸 살을 바다의 신이 보내는 인사라는 요리 명이 적힌 종이 봉지에 담아 내놓고, ‘닭 가슴살을 작은 둥지에 담아 내 놓는 데, 범선 모양의 둥지가 넘어지지 않도록 둘레에 야채와 그린 샐러드를 곁들이고, ’오페라 아이다가운데 이기고 돌아 오라라는 이름의 훌륭한 디저트와 설탕을 뿌린 납작하고 동그란 작은 과자가 나오고, 마지막 코스로 달콤한 리큐르가 나갈 것임. 이상의 작전을 수행하는 데 드는 경비는 포도주, 샴페인, , 꽃값, 그리고 음악 연주료 등을 포함해서 대략 100달러가 될텐데 완벽한 승리를 위해 비축한 돈은 단단히 간직해 두기 바람.”

 

저는 만약 저축해 둔 돈이 없으시다면 그렇게 많은 돈을 쓰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귀하를 위해 기꺼이 웨지우드 룸의 좌석을 예약해 두고자 하며 훌륭한 식탁에서 정중한 서비스에 식사하시고 아름다운 꽃을 마음껏 즐기실 수 있도록 만반의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물론 귀하와 귀하의 연인께서 메뉴를 보시고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주문하실 수 있도록 배려하겠습니다. 두 분께서 칵테일에다 훌륭한 식사와 샴페인을 드실 수 있는 데 이 모두를 르네 블랙씨가 제시한 가격의 1/3에 모시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항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오직 귀하에게만 있습니다. 혹시 저희가 이 작은 파티를 준비해도 될지 통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건승을 빌며

지배인 Henry B. Williams

 

추신; 귀하의 재미있는 편지에 당 호텔 주방장 르네 블랙씨는 감동한 것 같습니다.

 

나는 흥분과 고마움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했으나 이내 난처해졌다. 내가 저축한 돈은 100달러에 훨씬 못 미쳤고, 유감스럽지만 윌리암스씨가 르네 블랙씨보다 더 정확히 내 돈 액수를 맞춘 것 같다고 실토하고 테이블 하나 정도 예약 부탁한다고 통보하였다. 예약에 대한 확인은 되지 않았다. 내 편지가 윌리암스씨에게 전해지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 모든 이야기를 농담쯤으로 받아 들인 게 분명했다. 드디어 1127. 우리 해사 생도들은 당초 쉽게 이기리라고 기대 했으나 육사팀이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결국 2121로 비기고 말았다. 경기가 끝나가가 무섭게 나는 달려가 진을 만났는 데 그리던 모습 그대로 아름답고 멋있는 아가씨였다. 뉴욕 행 기차에서 나는 윌리암스씨로부터 받은 편지를 진에게 보여 주며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이 어딘지도 모르겠고 예약이나 제대로 되었는 지도 모른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아무튼 우리는 한 번 가 보기로 했다.

 

로비에 들어서니 오른쪽에 웨지우드룸이 보였다. 계단 아래쪽에 벨벳로프가 쳐져있었고 계단양쪽 위엔 웨이트가 버티고 서 있었다. 멋지게 차려 입은 수많은 남녀들이 입장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진과 서로 눈이 마주치자 나는 맘을 단단히 먹고 , 간다하며 잔뜩 주눅이 든 채 웨이트에게 다가가서 해사생도 인스입니다. 혹시 예약이 되어 있는지요?” 그러자 그 웨이트는 요술처럼 그 로프를 걷어 길을 내는 게 아닌가! “그러믄입쇼. 예약이 되어 있고 말구요하자 계단 위 웨이트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인스씨이신가요?” 미소 지으며 물었다.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니 이쪽으로 오시죠안내하며 손가락으로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에 급사장인 듯 한 사람이 방을 가로질러 우아한 식탁으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식탁에는 웨이트 두 사람이 몸을 약간 숙인 채 하얗고 긴 양초에 불을 붙이고 있었고...

 

; 버드의 앞서 식탁을 보니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촛대 사이에 작은 하얀 꽃병이 하나 있는데 은초롱 꽃과 분홍 장미가 꽂혀 있었다. 붉은 유니폼을 입은 웨이트의 시중을 받으며 앉고 보니 내 앞에 상자가 하나 놓여 있어 열어 보니 하얀 애기 난초 꽃으로 만든 코사지가 담겨 있었다. 메뉴는 손으로 그린 수채화로 회색 군함이 상단 오른쪽으로 항진하고 있었고, 왼쪽에는 푸른 잉꼬가 머리에 앉은 소녀의 머리가 밝은 색채로 그려져 있었다. 우리가 꽃과 테이블, 그리고 메뉴에 한참 넋을 잃고 있는 데 웨이트가 버드에게 칵테일 드시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우리는 둘 다 맨하탄을 시켰는 데 그것이 그날 밤 우리에게 물어 온 단 한 번의 의사타진이었다.

 

정찬이 시작 되었다. 촛불에 은식기가 반짝이고 크리스탈 잔들이 눈부시게 빛났다. 에디듀친의 악단이 조용히 음악을 연주하고 서비스는 한결같이 용의주도했으며 그리고 코스는 갈수록 좋아졌다. 정찬 코스가 절반쯤 진행되었을 때 특유의 큰 코를 가진 멋쟁이 은발 신사가 우리 테이블로 다가 왔다. “르네 블랙입니다. 저에게 화가 나시지 않으셨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이렇게 나왔습니다버드는 놀라 후다닥 일어났고 나는 방긋 미소로 답하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감사하다고 몇 번이고 거듭 말씀을 드렸다. 그는 의자를 당겨 앉더니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금도 자기 아내와 열애를 하고 있다. 오믈렛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며 1차 대전 때 자신의 프랑스 연대에서의 파티 이야기 등 듣기만 해도 즐거운 이야기였다. 메뉴도 직접 그린 것이냐고 물으니 그는 빙그레 웃더니 메뉴 뒷면에 펜으로 순식간에 주방장의 머리를 그리더니 그 밑에 프랑스말로 사랑이 키스만으로 족하다면 요리사의 명성의 무슨 소용 있으리요?’ 라고 썼다. 르네 블랙씨가 자리를 뜬 뒤 나는 버드를 바라보았다. 나는 육사와 해사의 경기를 관전하고 버드와 함께 주말을 보내려 오긴 했다. 그러나 지난 여름 잠깐 보았을 뿐 이 저돌적인 사관생도에 대해 내가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될 지에 대해 몹시도 궁금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저녁 딴 곳도 아닌 뉴욕의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앉아 있지 않은가! 방금 그 유명한 르네 블랙씨와도 담소를 나누고 왕족이라도 흐뭇해 할 정찬 대접을 받으며 함께 포도주 잔을 기울이고 있다니! !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버드; 잠시 후에 에디 듀친이 연주대를 떠나 우리에게 왔다. 전설적인 악단 지휘자인 그는 다정하고 친근한 목소리로 그 날 해사가 잘 싸웠다고 칭찬했다. 그도 2차 대전 중에 해군에 복무했었노라며... 진이 잠시 한 눈을 팔고 있을 때 그는 내게 상체를 기울이고 속삭였다. “자정에 네이비 블루 앤 골드를 연주하겠어요. 행운을 빌어요그리고는 싱긋 웃더니 피아노로 돌아갔다.

 

우리가 과일주를 들고 있는 데 웨이터가 로비에 전화가 와 있다는 연락을 주었다. 도대체 누가 전화했을까 의아해 하면서 따라가 보니 문밖에서 헤드 웨이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걸 테이블로 가지고 가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그가 계산서를 건네주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계산총액을 보았다. 그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다고 통보했던 그대로 33달러였다. 물론 그 금액이 월돌프에서 저녁식사에 어림도 없는 액수라는 것, 또 계산서를 그런 식으로 전해 준 것은 혹시 33달러도 없을 경우 당황해 할까봐 그런 것이라는 것이 분명했다. 한동안 말을 잊고 그를 쳐다보니 저희 호텔 직원 모두는 생도님의 일이 잘 되기를 빌고 있습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 버드의 환한 표정을 보며 무슨 전화냐고 물으니 아무 일도 아냐, 춤추겠어?”하고는 나를 부드럽게 플로어로 이끌어 갈 때 팔에 와 닫는 그의 손길을 느꼈다.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웃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 내 눈에는 오로지 버드만 보였다. 우리는 동화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저녁을 즐기고 있는 게 아닌가! 이 모두가 꿈이 아니라 현실인 것이다. “난 사랑을 느끼고 있어!”나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 사랑을 느끼다니 얼마나 근사한 일이람!”

버드; 자정 5분전, 우리는 행복감에 젖어 자리에 앉았다. 갑자기 주류 담당 웨이트가 샴페인 병 하나를 들고 내 곁에 왔다. 그는 소리와 함께 샴페인을 터뜨려 두 개의 크리스탈 잔에 거품이 솟구치게 따랐다. 내가 진을 향해 잔을 들어올리는 순간 악단의 드럼이 나지막이 울렸다. 이어 에디 듀친이 우리 쪽으로 목례를 하더니 손을 들었다 내리는 순간, 미국 어느 대학의 교가보다도 아름답고 가슴 뭉클한 멜로디가 흐르기 시작했다. “...... 전쟁터의 수병들은 네이비 블루 앤 골드를 입는 것을 고유의 권리로 삼았으니.....”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아리따운 진을 응시하며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나와 결혼 해 주겠소?” 하고 프로포즈했다.

 

; 버드와 나는 이듬해 6월에 결혼했다.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섯 아이를 낳았으며 해사생도는 해군 소장이 되었다. 지금도 우리는 윌리암스씨가 준 결혼선물을 펼쳐 보곤 한다. 그것은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의 역사를 담아 아름답게 펴낸 한정본이었다. 그 속에는 이 근사한 호텔에 투숙했던 대통령, , 군주, 그리고 왕자와 공주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호텔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어느 저녁이 있다. 친절하고 인간미 넘치는, 낭만적인 사람들이 사랑에 빠진 연인에게 행복의 문을 열어 주던 그 날. 그 날 저녁은 모두 우리의 것이었다. 블랙씨가 준 선물이 그것을 증언해 주고 있다. 블랙씨가 그린 수채화는 우리 집 식당에 30년 넘게 자랑스레 걸려있다.

 

그림 위에는 낯익은 블랙씨의 필체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Si l'amour ne demande que des baisers 'a quoi bon la gloire de cuisinier?

 

(If love requires only kisses, of what use is the fame of the c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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