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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15) 무진 기행

Dr조은샘 2021. 12. 18. 16:12

김승옥 소설 霧津 紀行=정훈희 노래=김수용 영화= 안개

남도 답사기를 따라 답사 1번지를 거쳐 순천만을 들른다. 여러 시인 묵객들이 순천만의 갈대밭을 보고서 그 감상을 아니 적지는 않았을 것이나 霧津橋라는 작은 다리를 지나면서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겨 본다. 霧津이라! 필경 이 말은 無盡; 끝이 없다無津, 항 포구가 아니다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안개 자욱한 포구로 귀결된다. 그렇다. 눈으로 보이는 갈대가 지천으로 깔려진 넓은 갯벌보다 더 한 것이 숨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안개다. 하여 갈대밭을 내려 보니 저쪽 멀리서 바람에 밀려오는 갈대의 모습이 마치 짙은 안개가 진군해 오는 듯하여, 청년시절 읽었던 글이 불현듯 생각난다. 이런 곳에서는 굳이 시인이 아니라도 시 한수나 노래 한 자락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가? 화가의 눈으로 갈대밭을 보며 작가의 머리로 작품을 생각하고 시인의 마음으로 노래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에서 안개를, 안개 속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 중 아리아 어떤 갠 날을 연관시켜 본다. 70년대 대표작가인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뜬금없이 이렇게 시작 되었다고 기억된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뺑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어린 시절의 공상, 불면, 무기력의 기억이 뒤엉킨 무진 출신 윤희중은 서울에서 다니던 회사가 합병하는 바람에 결혼을 약속했던 애인까지 잃고 실직자로 지내다 젊고 부유한 미망인이자 제약회사 딸인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여 신분의 수직상승을 하나 처가의 도움이 본질적으로 싫었던 그는 전무 승진을 앞두고 아내의 권유로 잠시 서울을 떠나 무진에 내려 와 있기로 했다. 그 사이 처가에서 주주 총회의 모든 절차를 마치기로 하고서... 시기와 질투, 반목과 암투가 판치는 서울의 현실을 자의반 타의반 잠시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돈과 명예와 지위가 함께 오는 신분의 수직상승을 떠밀려서 하는 체 하고 싶은 것이었다. 적어도 피할 수 없는 속물근성을 겉으로는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윤희중은 서울에서 실패로부터 도망하고 싶거나 무엇인가 새 출발을 하기 위해선 어김없이 무진을 찾은 기억을 되뇌며 또 한 번의 도피행을 한다. 어머니 묘소 성묘를 끼워 넣으면 교묘히 불효의 손가락질도 피할 수 있으니 더더욱 무진행을 택하게 된다.

 

무진으로 오는 길에 미친 여자가 나타나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는 와중에 주인공은 그 미친 여자에게서 자신의 암담했던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 즉 자신이 무진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고, 현재의 이런 속물이 되지 않았다면 그녀처럼 미친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 주는 매개체로 미친 여자가 등장한 것이다.

안개와 잠, 골방속의 수음과 초조한 기다림의 연속과 암울했던 어린시절의 기억과 도피의 공간인 무진에 도착한 윤희중은 학창시절 자신에게 항상 열등감을 느끼다 고시에 합격하여 지금은 세무서장으로 제법 자리를 잡아 지역 토착 세력을 형성하여 얼굴에 개기름이 잘잘 흐르는, 자신에게 현재의 모습을 보여주며 자랑하고 싶어 하는 친구 조와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순수한 청년 후배 박과의 술자리에서 서울 출신, 모교 음악선생인 하인숙과 우연히 자리를 같이 하게 된다.

 

하인숙은 서울에서 음대 졸업 성악회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 중 어떤 갠 날을 불렀다는 아리아 목소리를 가진 성악가다. 자신이 지금 이렇게 무진의 안개에 휩싸여 탈출하지 못하고 있지만 나에게도 그런 화려한 꿈을 가진 추억이 있노라 외치는 듯 하였다. 박은 순수한 애정을 담아 자주 하인숙에게 편지를 쓰나 하인숙의 마음은 오히려 돈 많은 조에 기운 듯한 눈치를 챈 윤희중의 눈에는 순수한 박이 외려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술자리에서 억지로 하인숙이 부른 목포의 눈물은 작부들이 부르는 그것에서 들을 수 있는 것과 같은 꺽임이 없고, 대체로 유행가를 살려주는 목소리의 갈라짐이 없었고, 흔히 있는 유행가의 청승맞음이 없었다고 기억한다. 성악을 한 아리아의 성대로 부른 목포의 눈물은 나비부인 초초가 부른 어떤 갠 날흐린 날엔 사람들이 헤어지지 말기로 하자.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잡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가까이 좀더 가까이 끌어 당겨주기로 하자라는 내용을 되뇌이며 아리아 가곡이 아닌 유행가 가사에서 그녀의 허무주의에 한없는 연민의 정을 갖는다.

 

순진한(?) 후배 박은 하인숙이 그런 하챦은 유행가를 이런 술좌석에서 부르는 것에 격분하여 자리를 뛰쳐나가는 순수함을 보여주나 그것이 그녀에게 무슨 감동을 줄까하는 피식 웃음기 섞인 연민도 느낀다. ‘유행가도 청승만 없으면 이렇게 사람의 폐부를 쑤시고 들어오는 구나하는 느낌을 받으며 아리아와 가곡에서 유행가로 전향한(?) 그녀에 대한 측은함이 자신은 전쟁에 나가 싸우고 싶었으나 홀어머니의 감시 속에 골방에 틀어 박혀 숨기고 싶은 수음으로 나날을 보내던 병역 기피의 젊은 날의 암울했던 기억과 폐병환자로 요양하던 비겁한 기억에 뒤섞여 노래를 듣는 내내 매우 혼돈스러웠다.

 

나비부인에서 핑커튼은 그야말로 주둔 중에 잠시 즐기고 싶은 여자를 원했으니 초초는 그의 사랑을 영원한 것으로 믿으면서 초초의 운명은 결정지어져 가고 있었다. 윤희중은 의도하지 않았다고 절규할지 모르나 하인숙에 대한 첫인상은 그렇게 자신에게 각인되고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그의 가슴 속에 들어왔고, 하인숙은 자신을 서울로 데려가 달라고 애원한다. 적군처럼 시도 때도 없이 밀려드는 무진의 안개를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짙은 안개 속에서 방향도 잃고 생각조차 없어져 버리는 무진의 안개가 죽기보다 더 싫었던 것이다. 하인숙은 무진의 안개만 탈출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다.

 

윤희중은 그녀에게 그러마고 약속하고 그가 폐병으로 요양하던 바닷가 그의 옛집 골방에서 사랑을 나누지만 차마 사랑한다는 말은 못 한다. 아무런 보장도 언약도 없이 그렇게 둘은 마음보다 먼저 몸이 하나가 된 것이다.

 

성묘를 다녀오던 방죽길에 죽은 술집 작부의 시체를 보며 그것이 무진을 탈출하려다 발버둥치다 죽은 자신의 일부라 생각한다. 아니면 하인숙일까?

자결한 나비부인일까? 황석영의 소설 삼포 가는 길에 등장하는 작부 백화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공사판 영달이 백화를 품어주던 것과 같은 연민을 함께 느끼면서...

 

그렇게 그녀와 함께한 시간이 흐르고 그는 마침내 그는 결심하고 그녀에게 편지를 쓴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제자신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겁니다... 무진을 떠나 제게로 와 주십시오...’ 편지를 쓰는 순간만큼은 서울의 모든 것을 다 내 팽개치고라도 하인숙과 함께할 사랑을 꿈이 절실했다. 몽상은 막다른 것에 의해 깨어진다했던가?

 

서울의 아내로부터 일이 다 해결되었으니 상경하라는 전보를 받는 즉시 쓰던 편지를 찢어버리고 떠 올리기 싫은 추억, 관념과 몽환의 장소인 무진을 떠나 현실의 아내가 있는 서울로 귀환한다. 그 순간 하인숙은 버림받은 나비부인 초초가 되고 윤희중은 자신이 의도하든 않든 나비 부인에서 떠나는 남자 핑커튼이 된 것이다. 무진의 하인숙도 나비부인처럼 언덕위에서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 결말은 독자의 몫으로 남기고 작가는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한다. 그냥 여기서 이렇게 글을 그만 두고 싶었던 것이다. 안개를 어떻게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지금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작가는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들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고 하였지만 이후 하인숙은? 바닷가 방죽 위에 죽어 떠밀려 온 작부의 시체처럼 생을 마감했을까? 아니면 자욱한 안게 속에 묻혀 탈출하려 몸부림치다 결국은 세무서장 조의 노리개로 전락했을까? 아니면 순수한 사랑을 바라던 동료교사 박의 사랑을 받아들여 안개 속에서나마 행복을 꿈꾸며 살고 있을까? 아마도 박과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모르긴 해도 무진을 떠나지 않고는 하인숙에겐 여자로서의 인생도 행복도 없었으리라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탈출은 안개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하고 싶음일 것이다.

 

이후 윤희중은 또 아내와 처가살이의 현실에 묻혀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무진을 그리워할까? 나비부인의 초초는 떠난 핑커튼을 기다리며 좋은 혼처도 마다하고 기다리나, 나가사키의 영사는 그가 미국에서 재혼했다는 소식을 차마 전하지 못하는데... 그러나 그녀는 그의 기다림에 절망하지만 언젠가는 자신을 찾을 거라고 굳게 믿고 아들의 키우며 살아 가는데... 하인숙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

 

나비부인 초초는 그가 돌아오는 배를 기다리며 나가사키 언덕위에서 하염없는 세월을 기다린다. 아들이 있다는 영사의 소식을 들은 핑커튼은 그의 새 아내와 함께 아들을 데리러 나가사키를 다시 찾는데.... 배가 온다는 사실에 환호하던 초초는 핑커튼의 새 아내와 아들을 데리러 왔다는 사실을 안 초초는 결국 생을 마감하고 만다.

 

이런 초초의 비극적인 결말을 알고 있작가는 과연 하인숙을 어떻게 처리하고 싶었을까? 아마도 더 이상 자신이 없어 하인숙의 결말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자신은 윤희중이 무진을 떠나는 것으로 작품을 끝내고 싶었을 것이다.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에 대한 불만이 가장 큰 불만 중에 하나가 필요하면 등장했다가 불필요하다 싶으며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없애 버리는 편리함이다. 작가는 편리할 지는 몰라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아주 불만이다. 실생활에 저해 되는 요소를 없애고 싶다고 없어지는 가? 이런 모든 것까지도 작가는 안개 속에 묻어 버리고 싶었는지 모를 일이다.

 

이 내용은 또한 안개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하여 많은 여성 관객의 심금을 울린 바 있다. 영화에서 윤기준은 어릴 적 무진에서 얻은 폐병(당시에는 창백한 얼굴의 힘없는 지식인이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병으로 한 두 달 입원하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고...) 병역기피자로 살아야 했던 지우고 싶은 젊은 시절을 가진 남자로 묘사 되었다. 이 글을 읽은 영화감독은 더더욱 무진에 대한 주인공의 기억을 몽환적으로, 버릴려고 발버둥치나 버릴 수 없는 숙명적인 기억으로 묘사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생각하면 무엇 하나 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아아~아아~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 속에 외로이 하염없이 나는 간다.

 

돌아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 가 다오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 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

 

When loitering alone on this street, suffered only with thickened mist,

with one shadow of yours once so affable ever!

What use is it to think about? Now it is a memory past.

Despite this, what yearning mind with burning heart,

Ah~~~~~~~Ah~~~~~~~Where has he gone?

I am heading alone endlessly in the mist.

 

When myself turning around, a low-toned voice

which is but stopping across my way

Oh, wind would please withdraw the mist

Ah~~~~~~~Ah~~~~~~~ Where has he gone ever?

Open your eyes in the mist and do hide your tears!

 

고음이 고운 열아홉 살 가수 정훈희가 부른 유행가의 가사를 이봉조의 중저음

색소폰 소리가 안개처럼 감싸 안는다.

 

시나 소설, 유행가 가사가 인생을 얼마나 함축하여 표현하는가!

아리아, 가곡과 유행가의 차이는 다큐멘터리와 소설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순천만의 갈대는 이렇게 안개와 뒤섞여 지천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의 혼돈 속에 우리를 빠뜨리고 만 것이다.

 

-2009년 연말을 여수, 순천에서 보내다-